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유타야 왕국 (문단 편집) === 쇠퇴 === 1688년 반정이 일어나 기존의 나라이 왕이 속해 있던 프라삿통 왕조가 무너지고, 마지막 혈통이자 반정을 일으킨 펫라차의 양자였던 소라삭 왕자 역시 왕위를 거부[* 소라삭은 이후 왕으로 즉위하는 펫라차에 의해 부왕직을 하사받게 된다.]하면서 나라이 왕계의 혈통이 끊겼다. 이후 왕사이자 재상이었던 '''펫라차'''가 반 플루 르앙 왕조를 열면서 르앙 왕조의 초대 왕, 즉 아유타야의 제28대 왕으로 즉위했다. 펫라차 왕 시절까지는 그래도 아유타야가 어느 정도 건재했다. 제30대 왕인 '''타이싸''' 왕 시절에는 대규모 운하를 건설할 정도로 국력을 과시했으나, 문제는 제31대 왕인 '''버롬마꼿''' 왕이 죽은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버롬마꼿은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적장자인 에까톳은 아둔하고, 그 동생인 우툼폰이 지혜로우니 왕이 되어야한다며 대놓고 선언해버렸고,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던 '''우툼폰'''이 1758년 왕위에 올랐으나 에까톳 왕자를 지지하던 일파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정치에 별 관심이 없던 우툼폰은 10일만에 형이었던 에까톳에게 선양하고, 왓 프라사(wat prasa) 사원에 들어가 불교에 귀의하며 승려가 되었다. 이로 인해 원래 적장자였던 에까톳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아유타야의 마지막 국왕인 '''스리야마린 보로마라차 3세'''이다. 동생의 선위로 예상된 형제간의 혈투는 일단 멈추게 되었으나 평소 인품과 성격을 알고 있던 대신들 사이에서 스리야마린 왕을 인정해야할지 말아야할지에 대한 당쟁이 심심치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유선(삼국지)|삼국지 유선 포지션이었던]]~~스리야마린 왕은 실추된 왕권과 현 상황에 크게 실망하여 정치에서 관심을 떼고 국정을 전혀 돌보지 않게 되었다. 당연히 이때를 틈타 이웃 버마 [[꼰바웅 왕조]]의 초대 국왕이자 명군이었던 알라웅파야가 상술한 바와 같이 버마 주요 지역을 대부분 장악하고, 테나세림을 통해 아유타야를 공격하기로 했다. 먼저 수군을 보내어 원래 버마와 아유타야의 국경도시였던 다웨이를 우회하여 해안가를 따라 1759년 테나세림 지역의 남쪽 끝 마을인 메르귀[* [[태국어]]로 미에익]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메르귀에서 타닌타리 강을 거슬러올라가 타닌타리 산맥을 넘어 아유타야와 방콕 인근의 펫차부리 지역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무서운 기세로 진군해오는 알라웅파야의 버마 군대를 막기 위해 보로마라차 3세는 남은 친위부대를 보냈지만 버마군이 모두 격파해버렸다. 결국 1759년 말 아유타야는 포위당했지만 여러 운하와 강 해자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에 수비군과 버마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위에 문단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듬해 알라웅파야가 가슴에 총상을 입고 전사했다. 결국 버마군은 철군했다. 물론 1761년 알라웅파야의 군대는 버마로 돌아가는 길에 마저 점령하지 못했던 무주공산 상태의 다웨이를 점령해 버마 영토에 정식 편입시켰다. 아유타야는 버마와의 전쟁에서 국력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더이상 재기가 불가능했다. 결국 얼마 못가 1765년 [[꼰바웅 왕조]]의 제3대 왕 신뷰신이 아유타야 침공을 감행했다. 군을 2개로 나누어 한쪽은 북쪽에서 란나를 통해서 남진시켰고, 한쪽은 전통적인 버마의 아유타야 침입로인 삼탑로로 동진시켰다.[* 알라웅파야 시절에는 테나세림 산맥을 건너가느라 병사들이 지쳐 아유타야와의 전쟁을 재대로 수행할수 없었는데, 신뷰신은 아예 테나세림 산맥을 우회하여 테나세림 지역의 북쪽 통로라 할 수 있는 삼탑로를 통해 미얀마 남부 해안도시인 모울메인을 지나 태국 국경인 메솟으로 진군한 후 남진하여 나콘사완, 롭부리를 수중에 넣고, 아유타야를 북쪽에서 포위했다.] 방 라잔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수개월 동안 항쟁을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태국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국내에서도 어떻게하면 케이블에서 볼 수는 있는듯하다] 프라야 딱 신[* 딱의 제후 신이라는 뜻. 이후의 딱신 대왕] 등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패색은 짙어져 아유타야 왕이 속국이 되겠다고 항복을 애걸했으나 그조차도 거절되었다.[* 당연히 한번 더 아유타야를 살려주면 [[나레수안|나레쑤언 대왕]]때처럼 다시 버마를 박살낼께 뻔했기 때문에 살려두질 않으려는 속셈이었다.] 결국 1767년 아유타야는 버마군에 의해 함락당한 뒤 방화와 약탈을 당했으며,[* 이원복 교수의 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 따르면, 아유타야 파괴 과정에서 빼앗겨진 보물은 현재 양곤 미얀마 국립박물관에 보존중이라고 하나 사실여부가 불투명하다.] 지배층과 백성 수만명이 포로로 끌려 갔다. 이 전쟁은 현재 미얀마-태국 민족 간의 감정을 나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버마는 청나라의 침공을 눈앞에 두던 상황이어서 아유타야 전토의 점령이 불가능해, 그 일대에 일부의 주둔군만 남기고 모두 철퇴했다. 하지만 중심세력을 잃은 아유타야(이하 시암으로 서술)[* 태국의 역사에서 왕조의 이름은 수도의 이름으로 한다. 이후 아유타야가 태국사의 주역이 된 이후 아유타야는 '사얌'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 명칭이 태국을 뜻하는 '시암'이 되었다. 아유타야가 멸망하기 전부터 아유타야는 시암이었고, 아유타야가 멸망하고 방콕-톤부리가 수도가 된 이후에는 더이상 아유타야라는 명칭은 맞지 않고, 현 왕조를 방콕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에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시암이라고 부른다.]는 사분오열되었다. 이 상황을 해결한 사람이 '''[[보로마라차 4세|프라야 딱 신]]'''(이하 딱신) 대왕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